문화대상 이작품

[문화대상 이 작품] 러시아 민중의 피날레 합창, 청중 압도

[문화대상 이 작품] 러시아 민중의 피날레 합창, 청중 압도

- 국립오페라단 "보리스 고두노프"
진한 흙냄새 나는 러 오페라, 28년만에 국내무대
주연 베이스 3명의 연기력 눈길
러시아정교와 카톨릭교회 힘 대결구도 눈길

[장일범 음악평론가] 1989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러시아 오페라라고는 전혀 본 일이 없던 한국 청중에게 충격적인 오페라가 한편 펼쳐졌다. ‘전시회의 그림’으로만 알고 있던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였다. 무려 베이스 3명이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이 진한 흙 냄새나는 러시아 오페라에 청중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빨려들어가듯 압도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 역사의 ‘암흑의 시대’라고 불리는 최악의 혼돈기를 그린 작품 ‘보리스 고두노프’가 절묘하게도 2017년 봄 무려 28년 만에 국립오페라단에 의해서 다시 한국 무대에 올랐다.

지난 4월 22일 토요일 오후 3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프로롤그의 크렘린 광장 앞 첫 장면부터 스테파노 포다의 무대는 청중을 압도했다. 스테파노 포다는 늘 자신의 연출과 의상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게 아쉽지만 크렘린 사원의 종을 앞세워 러시아를 상징하게 한 것과 “너는 우리를 모르는 체 하는구나!”라는 러시아 민중들의 불만이 강렬하게 러시아어 키릴 문자로 써있는 모스크바 장면(러시아 정교)과 라틴어로 벽면이 장식된 폴란드 장면(가톨릭)의 대조도 이 작품 이면에 펼쳐지고 있는 러시아정교와 가톨릭교회의 힘 대결 구도를 간명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러시아 지휘자 스타니슬라프 코차놉스키의 지휘는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정확하고도 예리하게 이끌어나갔는데 장면에 따라 베이스 파트가 좀 더 현을 힘차게 긁어서 깊고 거친 소리를 내줬으면 하는 욕심이 났다.

보리스 고두노프역의 미하일 카자코프는 빼어난 연기력으로 지성적이며 고뇌하는 고두노프를 들려주면서 기품있는 보리스 고두노프를 창조했다. 베이스 중에는 목소리가 가볍고 부드러운 편이어서 깔끔했지만 바리톤적인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다.

참칭왕(僭稱王) 드미트리와 정략적으로 한편이 되어 사랑을 나누게 되는 폴란드공주 마리나 므니세크 역의 알리사 칼라소바는 전성기의 올가 보로디나를 떠올리게 하는 러시아 메조 소프라노의 전통적인 우아하면서도 시원한 목소리로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특히 러시아 테너 세르게이 라린을 연상케 한 참칭왕 드미트리 역의 테너 신상근과 매우 아름다운 2중창 장면을 들려줬다. 사실 안티 히어로에게 이렇게 멋진 2중창을 안겨준 것도 오페라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라고 할 만 한데 마린스키 극장 상연위원회 통과를 위한 무소륵스키의 전심전력의 결과였다.

그런데 이 마리나 므니세크의 폴란드 장면은 포다가 연출한 마스네의 오페라 ‘타이스’의 하얀 방 장면과 의상등이 매우 겹쳤다. 결국 이 작품이 다 끝난 후 역사적으로 왕좌를 거머쥐게 되는 간교한 슈이스키 역의 서필도 역할과 잘 어울렸다. 테너 이석늑의 예언자 바보 역은 처절한 애절함이 좀 더 요구되었고 연대기 사가인 노수사 피멘 역의 베이스 이준석은 부드러웠지만 정확성과 깊이있는 가창이 아쉬웠으며 베이스 김대영의 파계한 주정뱅이 수사 바를람은 좀 더 유머러스했으면 싶었다. 마지막 피날레의 합창은 강렬했으나 1막 대관식 합창장면은 분산되어 약하게 전달된 것이 안타까웠다.

무엇보다 국립오페라단이 우리의 힘으로 한국 청중에게 익숙지 않은 가장 러시아적인 오페라 중 하나인 대작 사극 ‘보리스 고두노프’를 훌륭하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린 것에 큰 박수를 보낸다. 드보르작의 ‘루살카’ 비발디의 ‘오를란도 핀토 파초’ 비제의 ‘진주조개잡이’에 이어 사립오페라단에서는 올리기 힘든 레퍼터리를 새롭게 개발해 나가면서 김학민 단장의 국립오페라단은 대부분 제한된 유명 레퍼토리에만 매달리고 있는 풍토를 바꾸고 있다. 대작 ‘보리스 고두노프’가 앞으로 재상연되어 많은 청중이 이 러시아의 깊이 있는 사운드와 정치 드라마를 마음껏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장일범 음악평론가·KBS 클래식FM ‘장일범의 가정음악’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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